성경 – 전례 안에서, 전례에 의하여, 전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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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미사에서 성경 독서, 곧 하느님 말씀을 다양하게, 더구나 우리말로 듣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룬 전례 개혁의 열매입니다. 공의회는 신자들에게 풍요로운 말씀의 밥상을 차려 주라고 명하였고, 성경을 라틴말 대신 모든 교우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기 나라말로 번역하여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성경에 관한 달콤하고도 살아 있는 이해를 북돋워 줄 것도 당부하였습니다. 공의회의 이러한 결정은 “귀양살이” 하던 하느님 말씀을 고향인 하느님 백성의 품으로, 특별히 전례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례는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양식을 얻어 자라납니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사 전례는 성경에서 독서와 노래를 뽑아 독서집 (= 미사 전례 성경)을 만들어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독서들 (제1독서, 주일과 대축일에는 제2독서, 복음), 화답송 (시편), 노래들이 (입당송, 영성체송) 성경 거의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미사 경본도 성경 인용과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감사송을 포함한 감사기도문들, 장엄한 기도문들(서품, 봉헌, 축성 기도문), 다른 기도문들 (본기도, 예물기도, 영성체 후 기도)과 인사와 권고와 강복들이 그렇습니다. 미사나 다른 전례에 있는 예식과 동작들도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가져오고 성경이 그 뜻을 밝혀줍니다. 보기를 들자면 손을 얹음(안수), 기름을 바름, 재를 얹음과 같은 예식들, 그리고 팔(손)을 펼침, 무릎을 꿇음, 엎드림과 같은 동작들입니다. 나아가 성당을 비롯하여 전례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물과 기름, 소금, 초와 향 따위 물건들, 벽화와 모자이크와 조각과 같은 예술품 모두 성경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례 예식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든 것의 내용과 표현과 의미를 성경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본디 전례 안에서, 전례에 의하여, 전례를 위하여 태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갈대 바다를 건넜던 파스카 사건은, 그 목적도 근본으로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지만,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는 출발이 되었고 공동체는 이 사건을 전례 모임을 통하여 계속하여 새롭게 기억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많은 사건들, 이야기들이 수집되기 전에 오랜 세월 동안 전례를 드렸던 성소들 안에서 전승되었습니다. 시편을 보아도 많은 부분은 삶의 환경이 전례 안에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환경에서 태어난 다른 시편들도 전례 안에서 사용되었고, 전례에 이용되기 위하여 다듬어졌습니다. 잊힌 사건, 보존되지 않은 전승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존한 기록들은 전례 안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구약 성경이 모아지고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귀양 시기가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시기에 회당 전례가 태어났고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복음서와 서간의 많은 단락들이 자신이 태어난 전례 환경, 전례 회중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기억은 복음으로 기록으로 진행되기 전에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스승이신 주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공동체에게, 특히 주일 전례 때 이야기 하였고, 그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복음사가들이 그 자료들을 수집하고 거듭 묵상하여 마침내 문학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참고로, 150년경 순교자 유스티노는 전례 때 선포된 신약 특히 복음을 “사도들의 기억”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신약의 서간이나 다른 곳에 나타나는 신앙 고백 양식들, 환호, 인사, 축복, 영송, 찬가들이 처음부터 전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전례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소들이 기록들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뭉뚱그리자면, 성경은 전례 모임과 관련 속에서 고정되어 기록되고 다듬어져 공동체에 의해서 받아들여졌고, 다시 전례를 통하여 공동체를 비추고 자극하면서 실제 삶에 받아들여지는 여정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인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나 성경을 개인으로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규정된 장소나 시간에 듣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성경을 듣는 자연스런 기회와 장소는 전례 모임이었고 성경이 직접 겨냥하는 대상은 전례 회중이었습니다. 회중은 성경을 들으면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새롭게 하고 깊이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자로 된 성경은 전례 거행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힘을 다시 찾게 되며, 하느님은 당신 백성과 직접 대화를 계속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성경은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오늘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변합니다. 전례 독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례는 “살아 있는 성경”, “활동하는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례를 통하여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례 회중은 가장 올바른 성경 해석자입니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말씀 내용을 분석하거나 해석하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특정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전례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성경 묵상이나 공부만 하는 것은 아버지가 찾아오시어 말씀을 하시는데 다른 데 가서 옛날 보내신 편지를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하거나, 그 편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례에서는 보통 성경을 읽는다고 하지 않고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선포한다는 것은 말씀하는 분과 듣는 사람들 사이에 직접 만남을 지향하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잘 읽는 것,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적으로 세상 앞에서 기쁜 소식을 외치는 것, 그 소식의 가치와 그것을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환호하는 것입니다.

선포는 듣는 것을 전제합니다. 미사와 다른 전례에서 성경을 눈으로 읽지 않고, 선포한 것을 귀로 듣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디 글은 읽는 것이고 말은 듣는 것입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한 자리에서 직접 만납니다. 그러므로 글보다 말에 현장감이 더 있으며, 글보다 말이 더 살아 있습니다. 한편, 말로 대화할 때에는 보통 살아 있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쉬운 말을 쓰고, 억양, 음색, 몸짓, 표정 따위를 함께 사용합니다. 소통과 관련된 독특한 분위기도 만들어집니다. 나아가 이해가 덜 되면 말하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한편, 글은 말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말은 입에서 나온 순간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담아둔다고 하여도 이야기로 전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는 데는 직접 만남이 없습니다. 글을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만남은 글자를 통하여 간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글의 주인은 글자 뒤로 숨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생생함이나 현장감이 적습니다. 또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 글을 분석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도 그렇습니다.

 

전례와 관련된 옛 격언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오로지 하느님 찬양만 남는다.” 이 말은 문자로 된 성경은 사라지고 영으로 된 말씀만 남는다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전례.

 

 

심규재 신부 작성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교황청립 전례학 연구소(로마 성 안셀모 대학)박사학위, 수도자 신학원(서울)전례학 교수 역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One Response to 성경 – 전례 안에서, 전례에 의하여, 전례를 위하여

  1. 심규재 신부님, 아마도… 1월 전례학회때, 뵌것 같습니다. 특이한 복장이
    매우 신비스럽고, 아름답게 보여지고, 뭐랄까… 영성에 대한 어떤 지킴이
    같은 느낌이어서… 지금도 그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제가 미사때는 무척 행복하고, 마음이 고양이 되고 하는데, 혼자서…
    꾸준히 성경공부를 못하고, 이곳 저곳에서 닥치는대로 조각공부를 하고 있어서
    내심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 글을 읽으니… 많이 위로가
    됩니다만, 그래도… 차분히… 열중해서 읽지 못함은 반성해야 할것이고
    앞으로… 서서히 고쳐가야겠지요.

    신부님의 글에서… 오랜 묵상과 연마의 노력을 느끼게 됩니다. 현시대의
    영성적인 소통에 저도 참여하고 싶어서… 조금씩 노력을 합니다만, 저는
    잘해야… 아마도, 간접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할수 있지 않나 합니다만,
    그것도… 아주 많이 노력했을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꿈이 있다는것은 행복한 일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박지연 로사 2012년 5월 15일 at 10:39 pm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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