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자세 (서기와 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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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신화에 스핑크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짐승인 이 괴물은 길목을 지키며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맞춰야 살려 보냈습니다. 아침에는 발이 넷, 낮에는 둘, 저녁에는 셋인 동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영웅이 “사람”이라고 정답을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갓 태어나서 한 동안 기어 다니지만 (아침), 곧 두 발을 딛고 서게 되고 두 발로 걸어 다니고 (낮), 나이가 많아 기력이 떨어지면 지팡이에 의존합니다 (저녁). 옛 사람들은 두 발을 삶의 바다를 항해하는데 필요한 노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두 발로 서는 것이 근본적이고 중요합니다. 어떤 동물도 사람처럼 늘 두 발로 서 있거나 걷지 않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두 발로 서게 됨으로 어떤 결과가 뒤따랐을까요? 당연히 손을 땅에 짚을 필요가 없으므로 두 손이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손을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또한 두뇌가 발달하고 언어가 발전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서서 보기 때문에 보는 범위가 넓어진 것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위험을 빨리 알아차리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살아남기에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두 발로 서게 됨으로 시야가 넓어진 것과 관련하여 학자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람이 똑바로 서게 되면서 앞과 뒤, 위와 아래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사람은 우주 안에서 자신의 상황과 위치 대한 의식을 얻게 됩니다. 앞뒤는 시간 경험으로 열리고 위와 아래는 또 다른 하늘과 땅으로 넓어집니다. 사람은 한없이 크고 늘 변하는 하늘과 땅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힘 센 것, 일상과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발로 선 사람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지상 공간에 매여 살아갑니다. 오직 사람만은 두 발로 서서 생활함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는 것은 자기에게서 벗어난 사람, 온전한 사람, 보이지 않는 세상을 사는 사람임을 가리킵니다. 복음서에 보면 허리가 굽어 몸을 펼 수 없는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손을 얹으시자 그 여자는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루카 13, 13). 하느님을 아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겠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행위는 언제나 서서 합니다. 증언이나 선서를 할 때, 공식 임무 맡을 때는 서서 합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뜻을 싣고 있는 구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명을 맡기 전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할 때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1열왕 19, 11).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서서 들으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에제 2, 1).

또한 누구 앞에 서는 것은 존경과 섬김의 태도를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공동체나 봉사자가 말씀을 듣고 찬양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이 종종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레위 지파에게 “주님 앞에 서서 당신을 섬기며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하셨습니다.” (신명 10, 8). 솔로몬은 성전 봉헌 축제일에 서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참석한 모든 이는 서서 듣습니다 (1열왕 8). 또 묵시록에는 구원받은 무리가 어린양의 옥좌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묵시 7,9-10) 나옵니다.

 

성경의 전통에 따라 유다인들은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마태 6, 5; 마르 11, 25 참조).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 “열여덟 찬양 기도문”을 다른 이름으로 “아미다”라고 부르는데 “서서 (하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초세기에 그리스도인들도 똑바로 선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지하 묘지 (카타콤)에 있는 그림에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림들은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서서 팔을 펼쳐 올린 자세로 묘사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해가 솟아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서 기도하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고귀한 품위를 드러냅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께 죄에서 구원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부활하였고 그분 덕분에 하느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서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같은 뜻에서 서서 기도하는 것은 부활을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이며 기쁨의 주제를 기억시켜 줍니다. 예부터 교회는 주일과 부활절에서 성령강림절까지 서서 기도를 바쳤습니다. 실제로 제1차 니체아 공의회는 부활 시기에 무릎을 꿇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부활 시기에 삼종 기도도 서서 바치는 까닭입니다. 한편, 서 있는 것은 기다림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서서 기도하는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마중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전례에서 앉는 것이 허용된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서서 예식에 참여합니다. 기도를 바칠 때, 특히 주례가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모든 기도에서 언제나 서 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주례와 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바치며 동의하다는 뜻입니다. 다만 감사기도를 바치는 동안에는 무릎을 꿇도록 지시된 부분이 있습니다. 인사, 참회 예식과 대영광송, 신앙 고백, 강복과 파견 때도 서 있습니다.

복음 환호송을 부를 때와 복음을 들을 때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존경을 표시하고 마음을 기울여 듣고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주례가 입당할 때 (퇴장할 때도) 회중은 존경의 표시로 서 있습니다. 주례는 당신 백성 가운데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 보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도 보통 서서 받는데,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뢰와 품위, 하느님 백성의 신분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서방 전례에서는 앉아서 예식에 참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앉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나 긴장을 푸는 순간이 아니라 전례 자세입니다.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권위를 가진 사람은 앉아 있습니다. 모세는 재판하려고 자리에 앉습니다 (탈출 18, 13). 앉아 있음은 영광과 영예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의 옥좌나 식탁에 앉는 것은 부활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한편, 앉는 것은 스승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자리”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뜻에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치실 때나 (마태 5, 1)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앉아서 하셨다고 전합니다.

고대 교회에서 앉는 자세는 전례 거행에서 주교와 사제를 위한 자세로 그들의 품위를 겉으로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부제와 다른 봉사자들은 이 명예를 받지 못하여 서 있었습니다. 전례 예식을 주례하는 사람은 대표적인 “앉아 있는 사람”(prae-sedere = 앞에 앉다)입니다. 한편, 앉아 있기는 마음 집중과 듣기에 잘 어울리는 자세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마르 3, 32 참조). 루카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10, 39) 마리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례에서 회중은 복음 앞에 오는 독서를 들을 때, 화답송을 바치고 강론을 들을 때, 봉헌 예물을 준비할 때, 그리고 영성체 후 거룩한 침묵을 지킬 때, 필요한 경우, 앉습니다. 주의 깊게 듣고 마음 모아 찬양하는 것, 정성을 다하여 예물 준비 예식에 참여, 주님의 몸을 모신 뒤 사랑의 관상을 표시합니다.

 

동양의 전통과 묵상법은 바르게 앉는 방법을 늘 중요하게 여깁니다. 앉는 자세는 기도의 준비 자세일 뿐만 아니라 이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앉든 머리는 들고 턱은 당기고 어깨는 펴고 허리는 세우고 마음을 모으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규재 신부 작성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교황청립 전례학 연구소(로마 성 안셀모 대학)박사학위, 수도자 신학원(서울)전례학 교수 역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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