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위안 중에 있을 때

( 영성분별 6 )

이번에는 영적 위안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내적 위안을 체험할 때 가만히 그 원인을 살펴보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멋지거나, 내가 어떤 ‘장한’ 일 을 해냈을 때, 그렇지 않으면 내가 해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내가 바라거나 좋아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런 위안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체험은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도 이루어질 수 있다. 어느 특정한 사람과 대화를 할 때 용솟음치는 희열을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과는 한마디 말이 없어도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행복일 수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위안의 원인이 될 만한 생각이라든가 성취한 일이라든가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위안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경우 흔히는 의심을 하거나 걱정을 한다. 심지어는 ‘내가 무엇을 잘못 하고 있나?’ 하고 거듭거듭 성찰을 한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안심하고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험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시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어루만져주셨다’ ‘하느님을 맛보다(혹은 맛들이다)’ 라는 표현을 하거나 들을 때가 있다. 이러한 표현으로 체험되는 위안은 그 원인을 하느님 외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원인이 있는 위안은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악신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은 이 영혼을 더 격려해주셔서 인생의 질이 향상되어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나 악신은 이 ‘위안’을 미끼로 삼아 인생의 질을 낮추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유도한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9일기도를 열심히 하여 기울어가는 사업을 회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만일 이 사람이 이 9일기도와 성공을 계기로 신앙생활과 이웃사랑 실천에 일대전환을 일으키어 과거보다 더 성실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위안은 분명히 하느님의 선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이 일단 사업이 잘 되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사업에만 열중하면 된다’ 하고 ‘사업상’ 신앙생활을 냉담하게 된다면 십중팔구 이 사람은 악신의 농락에 빠진 것일 것이다.

 

위안 중에 있을 때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 드려야 하고, 고독 중에 있을 때 용기를 잃지 말고 주님께 철석같이 매달려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참고 : 영신수련 (3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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