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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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과 함께 살 때 일이다.

“남의 죄 혹은 허물 때문에 덩달아 내가 죄짓고 허물을 갖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아마도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 상황이나 느낌안에서 우상을 만들어 낸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 익숙하기 보다 세상의 것 그리고 죄에 익숙하다.

남을 비판하면서 남을 욕하면서 자신이 죄를 짓게 되고 자신도 어느새 그와 같이 변하고 있다. 죄는 나에게 전해져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해지고 나를 흔들어 놓고 자리 잡는다. 오히려 좋은 이야기는 나에게 전해져 전파되기 보다는 질투와 시기로 괴물이 되어 간다.

과연 우리 자신에게 행복이나 사랑이나 자비가 오래 머물 방이 있기나 있는 것인가?
과녕 우리에게 죄와 거짓이 정화될 장소가 있는 것인가?

행복감을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기보다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갈망과 노력에 전정긍긍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우리 하느님이라고 한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그 우상을 만들고 나서 숭배사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그릇된 우상을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주신 은혜와 정말 작은 것 안에서의 밀도있는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감을 유지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것에 대해 몰라 우리는 우상을 만들어 낸다.

진정한 행복감은 놓아두고 다른 허구를 좇아 외도를 하고 있다.

 

성체조배실에 앉아 있는다. 행복하다.

촛불을 켜고 하루의 일이 떠오르는 데로 바로 본다. 행복하다.

산책하다 묵주기도를 한다. 행복하다.

미사에 참여한다. 성가를 듣는다. 행복하다.

 

이 큰 행복들은 행복으로 시작해서 행복으로 끝나는 영원성을 갖는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만든것에서 사실 올수 없다. 나를 통해 하느님이 만드신 것에서 오는것이고
하느님이 만든 것을 내가 누리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것이다.

마약을 하던 한 연예인이 구속되면서 경찰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전 저의 주인이 아닙니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자기 손으로 만든 자기는 이미 자기가 주인이 아닌 그 무엇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벨탑은 내 안에 있다. 그리고 아직도 공사중이다.

 

 

 

허윤석 신부 작성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창에 "회복의 시간"을 치면 허윤석신부님의 홈페이지가 나온다. 오랜시간동안 신자들을 위한 힐링피정과 힐링음악 그리고 잔잔한 단상과 묵상이 풍성히 있는 이곳으로 초대한다. 강론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현재 성모기사회 잡지에 "곰곰히"라는 코너를 그리고 가톨릭 신문에 전례잠짜를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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