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성찬 제정과 축성문: 성찬 제정과 축성문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간직하며 살아가기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영문학 교수인 장영희씨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How to live & How to love)에 나온 에밀리 디킨슨의 ‘만약 내가(If I can)’라는 시가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앎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삶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소박한 소망을 조용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예수님은 어떤 누군가가 아닌 온 인류에게 희망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었고 본래 창조때 누렸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희생제사를 계속하기를 제자들에게 명하였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 루카 22,19).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받은 교회는 예수님이 제정하신 “합당한 예배”(로마 12,1) 를 행하면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셔서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지니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교회미사를 통해서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인”(사도 17,25)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찬미와 찬양을 한다. 이 예배에서 영적인 힘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과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려고 그리스도인들은 노력했다. 그 표본인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9,22)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얼마나 투신하였는지 이야기한다.

미사, 특히 감사기도에서 온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은 ‘성찬 제정과 축성문’이다. 미사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구원업적에 대한 기념과 찬양 및 감사는 바로 여기서 그 절정을 이루면서 재현되기에 미사 전체의 핵심이라 하겠다. 사제는 최후만찬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동작을 반복함으로써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한다. 사제는 다른 때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행한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의 인격에 함께 하시어 최후만찬 때와 같이 현존하시면서 직접 성찬을 거행하심을 드러낸다.

고대 성사집인『레오 성사집』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 업적이 이루어지나이다.”라고 하며, 사제가 감사 기도에서 기념 기도를 바칠 때,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거룩하고 살아 있는 제사를 바치고 있음을 드러낸다(미사경본 총지침, 2항 참조).

이 성찬 제정문의 성서적 근거로는 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카 22,19-20, 1코린 11,23-26이다. 현재의 네 가지 성찬 제정문 양식은 서로 조금씩 달라 제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이 기도문은 네 만찬 기사에 나오지만 처음부터 고정된 본문은 없었던 것이다. 사도 시대 이후에 주례가 자율적으로 창작하여 바치다가 차츰 고정되었으리라 본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1인 로마전문은 신약성서의 만찬 기사 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서의 내용을 수용하기도 하고 부수적인 기도문이 첨가되기도 하는 현상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2양식은 히뽈리또 양식과 거의 같으며, 3양식은 로마 전문에 가깝고, 4양식은 성서적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주님의 성찬제정 말씀은 사목적인 편리성을 고려하여 네 양식이 모두 동일하다.

이 기도문은 두 동작이 동반하는 데, 교우들은 무릎을 꿇고(미사경본 총지침 43항) 사제는 기도문 이후에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려보여서 교우들이 경배하게 하는 한다.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과 속죄의 자세이면서 또한 경건한 마음으로 흠숭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자리가 비좁거나 참석자가 너무 많거나 또는 다른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서 있어도 된다.

사제가 성체를 들어 올려 보이는 것은 정확한 도입 시기는 모르지만 중세 초기에 제대가 벽에 붙어 있고 사제가 교우들을 등지고 미사를 드리면서, 교우들은 제대에서 진행되는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1210년경 파리 주교는 자주 영성체를 못하는 대신 눈으로 축성된 빵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고 경배하려는 교우들의 열망에 부응코자 축성 후에 성체를 높이 들어 교우들에게 보여주라는 지시를 사제들에게 내렸다. 이것이 급속히 전파되어 13세기에는 성혈이 담긴 성작 거양과 경배도 도입되었고 비오 5세의 1570년 『미사경본』에 비로소 예규 정착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이 점차 경외심으로 성체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관습에 젖어버리자 비오 10세1907 성체를 보면서 토마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1,29)하고 고백하라고 규정하였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는 질문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 라고 질문자였던 율법교사 스스로 답하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율법교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사랑은 머리로,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 온 마음으로 해야 함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예수님은 오늘도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현존하시어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그리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간직하며 거룩한 주님의 잔치인 미사에 참여하여 이웃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로 다가갈 때,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나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라고 우리 모두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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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속 성경 한 말씀> 목차
1.성경과 전례: 불가분의 관계
2.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세례를 상기시키는 십자성호와 성호경(마태 28,19)
3.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축복의 인사
4.자비송(마태 9,27): 자비는 믿음이 있어야 실현된다
5. 대영광송: 루카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6. 말씀 전례: 말씀(Logos)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를 양육하신다
7. 강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 52,7)
8. 신앙고백: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9. 예물봉헌: 우린 과연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10. 감사송의 대화구: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드리는 기쁨!
11. 거룩하시도다: 이사 6,3과 마태 21,9 ‘거룩해서가 아니라 거룩해지고 싶은 열망인 담긴 찬가’
12. 성찬 제정과 축성문: 성찬 제정과 축성문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간직하며 살아가기 [현재 페이지]
13. 마침영광송: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교회의 찬미가

윤종식 신부 작성
1995년 서품, 1995년-1997년 불광동본당 보좌, 1998년1월-2008년 6월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전공, 2008년 9월-2010년 8월 화정동본당 공동사목 및 대표주임, 2010년9월-2012년 2월 정발산본당 주임. 2012년 3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전례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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