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날 -주제5.나의길- 예수그리스도3

3) 루가 7, 1-10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백인대장의 하인에 대한 사정을 들으시고,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청하는 바를 받아들여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신다. 백인대장의 집 근처에 다다르셨을 때에 백인대장은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예수 그리스도께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에 확신을 갖고 자신을 낮춘다. 당시의 백인대장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호령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사정을 할 필요가 없는 위치이며, 백인대장에게 있어서 종이나 하인의 존재는 단순한 소유물에 불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인대장은 종을 위해 머리를 숙이며, 청하는 그의 모습에는 어떠한이라든가 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백인대장이 한 것은 올바른 선택과 더불어 타인을 하는 선한 지향에 대한 믿뿐이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태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낮추고 이웃을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청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거절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선행의 결과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힘으로 드러난다. 리스도인이라는 은 선한 의지와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3. 청원기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만나고자 하는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할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당신의 길을 함께 가자고 초대하신다(산상설교 및 대중들 앞에서의 연설 등등). 많은 이들은 자신을 초대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좋은 말, 혹은 교훈적인 말로 이해하고 단순하게 마음에 새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자신에게 하는 말로 알아듣고 그 말씀에 응답을 한다. 이것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부르심은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일에 사도로써 초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천상잔치에 초대하는 의미도 있다. 초대에 응답은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일 읽는 복음이 우리들의 삶을 통한 관계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들에 대한 말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해 보았는가?

내가 불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지금 무엇이며, 불림을 받았다면, 누구를 위해서 라는 질문을 스스로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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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침기도


인 생

삶 속에서

우리를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은

만남과 이별이다.

만남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고, 이별은 충만함 때문이다.

부족할 때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충만할 때 홀로 선다.

부족함 때문에 서로를 기쁘게 만들고, 충만함 때문에 서로가 외롭다.

만남의 기쁨은 이별을 예약하고, 이별의 슬픔은 만남을 기약한다.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니, 인생은 기쁘고 또한 외로운 것이다.

 

기도를 통해 평화를 얻을 때도 있지만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과 의 관계에 대해 반성을 할수록 우리들의 모습이 처절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가 우리들의 삶에 중심에 있을 때 더 많은 사랑과 아픔, 그리고 선과 악, 은총과 벌, 감사와 미안들을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도는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해 주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청하는 것을 조용히 주님께 말하면서 잠시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으로 마친다.

조학균 신부 작성
1987년 예수회 입회,1995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신학부 졸업,1996년 사제서품,1998년 로마 안셀모 대학 전례학 석사,2003년 로마 안셀모 대학 전례학 박사,현재 대전가톨릭대학 전례학교수 및 영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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