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날 –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3)

3) 요한 8: 42-4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 가운데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고 입증할 수 있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듣기 위해서는 대화를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말씀을 하실 때 정녕 우리는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어디선가 읽었던 경청에 대한 내용을 요약해 본다.

1) 공감을 준비하자

대화를 시작할 때는 먼저 나의 마음속에 있는 판단과 선입견, 충고하고 싶은 생각들을 모두 다 비워내자. 그냥 들어주자. 현악기나 관현악기가 텅 비어있듯 텅 빈 마음을 준비하여 상대방과 나 사이에 아름다운 공명이 생기도록 준비하자

2) 상대를 인정하자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잘 집중하여 상대방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인정하자. 상대를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해야 진정한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3) 말하기를 절제하자

말을 배우는 데는 2년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고 한다. 누구나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상대를 이해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해 받고 싶은 욕구가 앞서기 때문이다. 이해 받으려면 내가 먼저 상대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 받으라, 말하기를 절제하고 먼저 상대에게 귀 기울여 주자.

4) 겸손하게 이해하자

겸손하면 들을 수 있고, 교만하면 들을 수 없다. 상대가 내 생각과 다른 말을 해도 들어 줄 줄 아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경청의 대가는 상대의 감정에 겸손하게 공감하며 듣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말을 진정으로 들어주고 자기를 존중해 주며 이해해 주는 것이다.

5) 온몸으로 이해하자

경청은 귀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도 하고 입으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는 것이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계속 표현해라. 몸짓과 눈빛으로 반응을 보이라. 상대에게 진정으로 귀 기울이고 있다는 신호를 온몸으로 보내자.

 

그리고 어느 연인사이에 오고 간 마음의 글을 되새기자.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당신은 충고를 시작하지.
나는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당신은 말하지.
당신은 내 마음을 짓뭉개지.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면, 나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야.

들어 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 아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좋아.
그저 내 애기만 들어주면 돼.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3. 청원기도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어려움과 답답함에 직면하게 되면 삶을 비판한다. 우리들은 왜 이럴까? 다른 이들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들이 찾고자 하는 오아시스는 존재하는가? 하는 등등을 자문한다. 여기서 우리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우울증에 빠지며, 비교를 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이런 우울증과 불행은 남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삶은 마치 사막과 같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한도 끝도 없는 모래 속에서 무작정 앞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오아시스의 물을 찾아서…. 과연 우리가 찾는 것이 사막에 있는 물인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오아시스인가?

우리는 운명적으로 사막이라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그 사막을 는 것이지, 사막에 안주하고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스라는 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의 사이에 있는 정류장인 것이다. 우리가 정류장에 한도 끝도 없이 머물 수는 없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야만 하기 때문에 애타게 찾은 그 시스는 때가 되면 떠나야만 하는 곳이다. 그런 정류장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치 그곳이 목적지인양 안주 하고 싶어 한다. 우리들의 목적지는 사막을 건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막을 건너기 위해 고통과 어려움 등을 만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사막을 건너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막에서 필요한 것은 물이다. 하지만 물은 필요한 만큼 있으면 된다. 만일 필요한 만큼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면 사막을 건너는데 오히려 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갈증을 느낄 때만 필요한 것이지, 아무 때나 마시는 것은 아니다. 바다가 썩지 않으려면 3%의 소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3%의 소금 때문에 97%의 물은 썩지 않는 것이다. 만일 바다가 욕심을 부려 3%이상의 소금을 소유한다면 유명한 사해(死海)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하느님의 은총도 3%만 갖고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의 은총은 타인들과 공유하며,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자신도 사해가 될 것이다. 은총은 나눌수록 더 풍요롭게 느끼고 아름다워지고, 향기로워 진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또한 얼마만큼 필요한 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어리석고 욕심이 많다는 증거이다. 목적을 상실한 삶을 살며, 불편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상실하지 않고, 그 목적을 향해 걸어간다면 우리는 그 어렵다는 사막을 무사히 건널 것이며,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란 사막에서의 물과 같다. 아니 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어떤 순간에도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다. 목표를 향해 갈 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지적해 주시는 분을 만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마침기도

욕량타인 선호자량 (欲量他人 先須自量)

: 남을 헤아리려거든 자신을 먼저 헤아려라.

상인지어 환시자상 (傷人之語 還是自傷)

: 사람을 헤치는 말은 자신을 헤치는 말이다.

함혈분입 선오기구 (含血噴入 先汚其口)

: 입에 피를 머금고 뱉으면 먼저 자기 입이 더러워 진다.

-명심보감 중에서-

 

판단하기에 앞서 항상 자신을 돌아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남을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이 기준이 될 때, 상대방은 우리들에 의해 상처받고 힘들어 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을 조용히 주님께 말하면서 잠시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영광송으로 마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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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학균 신부의 “주님과 함께 하는 8일 산책”
1) 여섯째 날 –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1) [바로가기]
2) 여섯째 날 –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2) [바로가기]
3) 여섯째 날 –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지 못하는 이유(3) [현재 페이지]

조학균 신부 작성
1987년 예수회 입회,1995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 신학부 졸업,1996년 사제서품,1998년 로마 안셀모 대학 전례학 석사,2003년 로마 안셀모 대학 전례학 박사,현재 대전가톨릭대학 전례학교수 및 영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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