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행동이 평화의 상태를 만든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바란다. 그러나 각자가 바라는 평화의 형태나 차원은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평화는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하신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인사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교회는 미사의 영성체 전에 신자들이 서로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나누도록 한다. 예수님께서 주시고 교회가 희망하는 평화는 죄의 용서를 위한 십자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7년 전에 《나가사키의 노래》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는 1945년 8월 9일 72,000여 명의 희생자를 낸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 나가이 박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무엇이고 왜 희생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우리 인류는 아담의 죄와 카인의 죄를 물려받았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였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잊고 살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으며 사랑을 잊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면서, 서로를 죽이면서, 신나게 서로를 죽이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사악하고 무시무시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희생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도시가 모조리 날아갔습니다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나가사키의 번제물만이 충분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었고, 그때서야 하느님은 천황을 움직이시어 전쟁을 종식시킬 거룩한 선포를 하게 하셨습니다.
나가사키의 ‘그리스도의 양 떼’는 3세기의 긴 박해를 견뎌내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이 전쟁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진정한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몇 백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의 제단에 번제물로 바쳐져야 했던 ‘흠 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나가사키의 노래》, 폴 글린 지음, 김숭희 옮김, 바오로딸, 2005년, 230-231쪽).

‘주님의 기도’와 부속 기도를 마치면 평화 예식이 뒤따른다. 사제는 요한 14,27을 인용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듯이 교회에도 평화를 달라고 간청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이어서 사제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신자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이 평화는 우리의 평화도, 세상의 평화도 아닌 주님의 평화다. 신자들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하면 사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하고 권고한다. 신자들은 “평화를 빕니다”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스티노 폴리토 교부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 초기부터 평화 인사는 성찬례의 일부였다.
그 동작은 히브리나 아랍 문화에 뿌리를 둔 고대 중동의 관습에서 유래한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오늘날의 히브리 인사 ‘샬롬 알레켐(Shalom Alechiem)’과 아랍 인사 ‘아 살람 알레이쿰(A Salam Aleicum)’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인사는 바오로의 일관된 메시지였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로마 16,16 1코린 16,20 2코린 13,12 1테살 5,26).

5세기 초엽부터 북아프리카 전례의 영향을 받은 로마 교회는 평화 예식을 감사 기도 에 거행하였다. 특히 6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 예식을 ‘주님의 기도’의 한 구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와 연결하여 영성체 준비 예식으로 알맞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 다음으로 옮겨놓았다. 초기의 평화 예식은 서로 입을 맞추거나 포옹하면서 “평화가 당신과 함께”나 “그리스도의 평화” 하고 인사하는 단순한 예식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평화 기도와 평화 기원 인사 등이 도입되었다.

여기서 청하 평화 전쟁과 투쟁이 없는 평화나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를 뜻하지 않는다. 이 평화는 무엇보다 예언자들의 예고와 같이 미래의 구원자인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평화다. 평화 인사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이들에게 하려고 자리를 떠나고 긴 시간을 할애한다면, 영성체 준비라는 의미가 상실되고 전례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이 평화로워야 다른 이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평화를 기원하는 행동을 하다 보면 평화가 다가온다. 곧 내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평화의 행동(Doing Peace)을 하면 평화의 상태(Being Peace)가 될 수 있다. 평화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여겨 일상에서 오는 평화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평화를 나누는 행동을 하고 평화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다. 전례에서 행하는 평화 예식은 이러한 교회의 지향을 잘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시며 능력 여하와 상관없이 사랑과 평화를 주러 이 땅에 오셨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평화를 지닌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다면 사랑으로 평화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처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성체 전에 평화를 기원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평화 자체인 그리스도를 모신 후에는 그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파견된다.

곧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사도 바오로의 충고를 새기며 따스한 봄볕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란다.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9).

윤종식 신부 작성
1995년 서품, 1995년-1997년 불광동본당 보좌, 1998년1월-2008년 6월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전공, 2008년 9월-2010년 8월 화정동본당 공동사목 및 대표주임, 2010년9월-2012년 2월 정발산본당 주임. 2012년 3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현,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전례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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