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인사 – 그것이 로마 전례에서 지니는 본질

영성체 직전에 신자들은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얼굴에 반가운 미소를 띠고 악수도 하고 절도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마치 길에서 서로 처음 만난서 반가운 듯 들뜬 마음으로 인사하기에 대부분의 경우 성당 안은 잠시 시끌벅적한 장터처럼 변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신자들은 평화의 인사를 서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떠들썩하고 번잡한 인사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장례 미사에서는 침통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평화의 인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평화의 인사에 대해서도 또 장례 미사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기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1996년에 임시 출판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 미사 통상문 129항에는 평화의 인사를 “장례 미사에서는 생략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사는 여러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지니며 평화의 인사 역시 인사이기에 그 문화에 맞는 형태를 지녀야 하므로, 지역 교회의 주교회의는 그 교회가 속한 문화에 알맞게 인사의 형태를 적응시켜 제시할 수 있으며 사도좌의 인가를 받아서 확정할 수 있습니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82항; 390항 참조). 그러나 지역 주교회의가 어떤 미사에서건 평화의 인사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로마 전례를 그 문화에 맞게 적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전례 자체를 준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말 미사 통상문 129항에서 장례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 자체를 생략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오류입니다.

 한편, 우리말 미사 통상문에서, 웃는 얼굴로 떠들썩하고 장황하게 하는 평화의 인사가 장례 미사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고 생략할 수 있다고 했는데, 평화의 인사가 과연 그렇게 떠들썩한 것일까요? 그리고 장례 미사는 또 그렇게 침통한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평화의 인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 또한 장례 미사의 본질은 무엇인지 – 올바로 알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동방 교회 및 서방 교회 대부분의 전례에서 평화인사원래 있었던 위치는 ‘감사기도 후, 영성체 직전’이 아니라 ‘보편 지향 기도 후, 감사기도 직전’입니다.
곧 성찬 전례가 시작되기 직전에 평화의 인사를 하였던 것인데, 이는 로마 전례도 마찬가지였으니, 이를 성 유스티노가 150년경에 저술한 『제1 호교론』 65,2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던 것은 마태 5,23-24에 나오는 주님의 명령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이러한 맥락에서 평화의 인사는 같은 주님의 몸을 모시고 하나로 일치하여 구원받을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에서 예물을 바치기 에 먼저 서로 화해하고 마음으로부터 일치하게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416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1세(Innocentius I, 402-417)가 데첸시오(Decentius)에게 쓴 편지에서는 감사기도가 끝난 다음에 평화의 인사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로마 전례에서는 에, 평화의 인사의 위치가 ‘감사기도 후, 영성체 직전’으로 옮겨졌다는 말인데, 이는 다른 전례들이 보여주는 일반인 모습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로마 교회의 독특한 성찬례 역사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원래 로마 교회의 신자들 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점점 그 수가 늘게 되면서, 변방의 여러 성당들을 ‘띠루스’(titulus)라고 부르며 거기에 사제를 파견하고 그 성당을 책임지게 하였음을 『교황 실록』(Liber Pontificalis)의 교황 에바리스토(Evaristus, 96/99-105/106)에 관한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가 이미 1세기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띠뚤루스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거행하는 신자들이 여전히 교황과 하나로 일치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자신이 축성한 성체 조각을 각 성당에로 보냈는데, 이것을 ‘페르멘툼’(fermentum; 누룩)이라고 하며, 이 관습은 교황 멜키아데(Melciadis, 311-314)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교황 실록』은 증언합니다.
이후 8세기까지의 여러 증언들을 통해 살펴보면, 각 성당에서 한 사람씩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파견되어 성체보를 들고서 대기했으며, 교황이 성체를 축성하면 차부제가 그 조각들을 각 성당에서 온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들은 곧바로 성체 조각을 들고 자기가 속한 성당으로 돌아갔는데, 만일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영성체 단계에 이른 성당에서는 더 이상 미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중단한 채 그 성체 조각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페르멘툼이라 불리는 이 성체 조각이 도착하면 비로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라고 하면서 평화의 인사를 했고 그 조각을 성작에 넣어서 섞었다고 합니다.

결국, 로마 전례에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위치가 영성체 직전으로 옮겨진 것은 이 페르멘툼이라는 성체 조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교황이 축성한 성체 조각을 가져와서 본당 신부가 축성한 성혈에 섞은 것은, 비록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각각 따로 모여 서로 다른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지만 모두가 교황이 – 또는 주교가 – 집전하는 단 하나의 성찬례에 참여하여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진 관습이었습니다. 로마 전례 성찬례사의 이러한 맥락 안에서 평화의 인사는, 단순히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넘어서서, 지상에 널리 펴져 있는 온 교회가 교황과 주교를 중심으로 하여 같은 성체를 모시고 하나로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데에 그 강조점이 있습니다.

한편 요한 묵시록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중심으로 하여 천사들과 성인들이 둘러선 가운데 천상의 전례가 거행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하느님의 어린양이 바로 지상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일치하여 거행하는 성찬례의 바로 그 성체이니, 우리가 이 땅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바로 그 순간 같은 주님의 몸을 중심으로 둘러서 있는 천상 공동체에 이미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상 전례와 천상 전례의 합일’(전례 헌장 8항)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성체 직전의 평화의 인사는, 교황과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지상 교회의 일치만이 아니라, 미사 전례를 통하여 천상 공동체와 지상 공동체가 하나로 합일한다는 장엄한 면모까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미사를 통하여 산 이와 죽은 이가 한데 모이고 일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로마 전례에서 신자들이 함께 나누는 평화의 인사이며, 이것은 다른 전례에서는 볼 수 없는 로마 전례의 고유한 본성에 속하는 것이기에 이 평화의 인사를 어떠한 경우에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한 그리스도인이 지상 공동체에서 천상 공동체로 건너감을 기념하는 장례 미사야 말로 지상 공동체와 천상 공동체의 합일을 드러내는 평화의 인사가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니, 이제 천상 공동체로 건너가는 이 그리스도인이 으로도 여전히 지상에 있는 우리와 한 몸으로 일치해 있을 것임을 평화의 인사를 통해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도권은, 이 평화의 인사를 장황하고 떠들썩하게 하지 말고 옆 사람과 장중하고도 엄숙하게 할 것이며(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82항, 구원의 성사 71항), 이때 주례 사제가 성체를 방치한 채 함부로 제단을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로마 미사경본의 총지침 154항, 구원의 성사 7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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