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가 구분되어야!

 

 사제는 미사때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라고 말하고  미사에 참석한 하느님 백성 모두는 서로 악수하거나 머리숙여 인사하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한다.

영어미사때는”peace with you”라고 말한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하지만 “peace with you”라는 말은 쉽고도 아름답고 또 외국미사때는 꼭 필요한 듯 하여 암기하고 다닌다.

미사가 전세계 어디나 동일하니 불편함이 없다. 영어나 불어나 중국어로 미사를 해도 미사경문이 동일하다. 그래서 내가 할 대답이나 역할을 한국말로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부분 평화의 인사를 할때 나는 “peace with you”라고 짧은 영어한마디와 미소로 평화를 나눈다.

 

미사때 나누는 평화의 인사!에 관해서 필자는 재미있는 체험을 한적이 있다.

필자가 사제가 되어 얼마뒤 로마에 갔을 때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제단에는  여러분의 외국인 사제가 계셨고 나혼자 한국인이었다.

유럽에서는 미사때 서로 허그 즉 안아주기를 한다. 그래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갑자기 제단에 계신 외국신부님이  나를 안아주려하자 나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은 못하고 나를 안아주시려는 그 신부님에게 미안해서 ” I am Sorry!” 라고 말해서 제단에 웃음소리가 울러퍼진적이 있었다.

평화의 인사때 하는 인사의 방식은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따라 다르다. 북유럽에서는 두볼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는 마치 무엇을 잘못한 것인양 연간 굽신 거리는 동작을 하거나 필리핀에서는 꽃을 서로 목에 거는 것도 보았다.

 

미사때 사제가 권고하는 평화의 인사에서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 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평화는 성서에 바탕되어 있으며 그 어원은 샬롬(Salom)이란 말이다.

샬롬이란 히브리말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으로 닮고 일치될 때 갖게 되는 기쁨과 평화를 말한다.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으로 창조된 존재!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바로 인간의 정의인것이다.

그러나 죄로 물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을 잃어버리고 변질시켰다.

로마의 성 시스틴 성당의 벽화에는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죄를 짓고 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의 얼굴을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에덴 동산의 두 사람의 얼굴은 하느님과 닮은 젊고 밝고 미소짓는 얼굴이지만 동산을 떠나 도망가는 그들의 얼굴은 늙고 수심이 가득하며 어둡다.

인간의 불순명과 탐욕이 불러온 결과이다.

새로운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하와인 마리아는 순명과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이룩하였고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가능하였다.

그리고 수난 전날 제자들의 발을  가장 낮은자 되시어 닦아 주시는 예수님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마지막 파스카 만찬 상으로써 당신은 이제 새로운 파스카 제물! 완전한 희생양이 되시는 제사를 완성하시어

당신의 제자단인 교회에 이 예식을 행하도록 명하시었다.

이러한 미사는 따라서 평화의 미사이며 미사는 평화를 얻는 하느님이 주신 가장 완전한 방법이며

하느님의 모습과 그분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알아뵙는 시간이며 현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구원사업의 결정체인 미사를 참여하는 자격과 권한을 갖게 된것이다.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는 따라서 생략될 수 없다.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가 생략된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다시 찾기 위한 그리스도의 업적인

평화의 나눔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미사경문의 변경은 한교구나 교구장이나 그 국가의 주교단에 있지 않고

오직 교황성하에게만 유보된 고유한 권한이다.

 

그러므로 장례미사때 평화의 인사가 생략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장례미사때 평화의 인사는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죽음의 슬픔과 인간한계의 최고점인 죽음을 인식하는 이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눌 존재적인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을 통해 샬롬 즉 하느님과 하나되느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분의 모습을 닮기 때문이다.

장례미사를 포함한 모든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란 바로 우리 신앙의 고백인 것이다.

 

부활을 전제로 하지 않는 평화란 일시적인 휴식에 불과하다.

 

그 어느 나라의 미사경문에도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를 생략할 수 있다고 나와있지 않다.

 

예전에 잘못된 관행과 표기로 한국에서 장례미사때 평화의 인사를 생략할 수 있다는 표기를 하였고

 

그로인해 대부분 장례미사에서 해설자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 무조건 “하느님의 어린양!”하고 말하였다.

 

생략이 아닌 평화의 인사가 삭제된 것이다.

 

지금도 어느 성당에서는 그렇게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미사때 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안다면 ……….

 

한국의 전통 장례 풍습에서 장례식때 평화의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죽은 사람앞에서 무슨 산사람들이 평화를 언급할수 있느가?  이러한 처사는 효에 어긋난 볼경한 예절이라고 생각할 수 잇다.

물론 우리 정서에는 맞지 않기에그렇게 생략과 삭제가 일어난것으로 보여지나 그것은 미사에서 평화의 인사의 본질적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여진다.

 

평화의 인사를 생략하는 몇몇 신부님에게 위와 같은 말씀을 자세히 드리니 흔쾌히 바꾸셨다.

 

가톨릭의 전례는 유연성과 토착화의 정신을 존중하고 실천하지만 그 본질을 바꾸거나 합치될 수 없는 부분은

 

잘 지켜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허윤석 신부 작성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창에 "회복의 시간"을 치면 허윤석신부님의 홈페이지가 나온다. 오랜시간동안 신자들을 위한 힐링피정과 힐링음악 그리고 잔잔한 단상과 묵상이 풍성히 있는 이곳으로 초대한다. 강론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현재 성모기사회 잡지에 "곰곰히"라는 코너를 그리고 가톨릭 신문에 전례잠짜를 집필하고 있다.

2 Responses to 세상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가 구분되어야!

  1. 신부님 글 잘 보았습니다. 장례미사 참례시 항상 궁금하였던 내용인데 잘 일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현재 사용되는 미사통상문에서도 장례미사 시 “평화의 인사”는 생략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미사 중 거행되는 “평화의 인사”의 참 뜻을 되새기고 각 본당에서 실제 적용하려면 이러한 것 부터 맞게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래는 주교회의 홈페이지 미사통상문 내용입니다)

    평화 예식

    신자들은 평화 예식으로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하여 평화와 일치를 간구하고, 또한 성체를 모시기 전에 교회에서 누리는 일치와 서로의 사랑을 표현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 아멘.

    +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와 함께.

    +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 평화를 빕니다.

    dain0516
    dain0516 2012년 1월 30일 at 2:39 pm 응답
  2. 세상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를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병학 2012년 2월 5일 at 10:13 pm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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