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요 악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

제목: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요 악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 마을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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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을 해설하기 전에 저는 오늘 미사의 본기도를 다시 한번 묵상하기를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저희에게 성자 그리스도를,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요 악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주셨으니, 저희가 힘차게 믿음을 고백하여 말과 행동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는 이들의 참행복을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우리는 예수님을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한평생 은총을 주시는 구원자로서는 잘알고 그렇게 믿고 기도안에서 많은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기도에서 지혜를 주시는 스승이 악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보다 먼저 문장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지혜를 주시는 스승으로 인정하며 그분께 지혜를 얻고자 노력합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당신에게 주님은 스승이라고 그리고 당신은 그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니 그리고 천주교를 만드신 분이 예수님이 당연히 나는 신자고 힘들 때 그분께 도와달라고 청하고 마음의 평화를 위해 미사를 나갈 따름이니 그분은 기도의 대상이고 찬미의 대상이지 사실 내가 성서와 전례를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이 주신 지혜를 깨닫고 실천한 그런 여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지혜는 무엇입니까?  성서에서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 (잠언 9,10)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지혜 6,17)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며,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지혜를 타고 난다.” (지혜 1,14)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 있습니까? 이제 그 진실한 소망을 가지신다면 지혜서에서 말하였듯이 지혜의 시작을 이루신 것이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한 생활을 시작하신다면 지혜의 시작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칭하는 호칭 중에 “스승”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호칭이 스승이외에서 하느님의 어린양, 사람의 아들, 메시아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은 제자로서만 불리웠습니다. 즉 교회와 주님의 관계성은 근본적으로 스승과 제자단이었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성은 “가르침”과 “배움”으로 유지 됩니다.

스승이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리고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지 않는다면 서로는 이러한 호칭을 잃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를 주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제자가 되어 그분이 주시는 모든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믿고 믿는 만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지혜서 1장 1절부터 30절의 말씀입니다. 너무나 좋고 감동적이어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을 지혜에 관한 30계명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 지혜에 관한 30계명

1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2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나날을 누가 셈할 수 있으랴?

3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와 땅 속의 깊이를 누가 잴 수 있으랴?

4  지혜는 저 모든 것들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며 현명한 이해 역시 태초로부터 있다.

5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6  지혜의 근원을 누가 밝히 알아냈으며 그 오묘한 기획을 깨달은 자 누구냐?

7  지혜를 밝히 깨달은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 지혜의 풍부함을 이해하고 완전히 따른 자   도 없다.

8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9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10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주신다.

11  주님을 두려워함은 행복이요 영예며 쾌락이요 환희의 극치이다.

12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과 희열을 맛보며 수를 누린다.

13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삶의 끝이 좋으리니 죽는 날에 축복을 받으리라.

14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며,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지혜를 타고 난다.

15  지혜는 사람들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어 영원한 터전을 삼고 그들의 후대에도 그 곳에서 안식한다.

16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성숙이며 지혜는 그 열매로 사람들을 흡족케 한다.

17  지혜는 그들의 집안을 재물로 그득 차게 하고 그들의 곳간을 곡물로 채워준다.

18  주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완성이며 지혜는 삶의 번영과 건강의 꽃을 피운다.

19  지혜는 지식과 총명을 비처럼 내려주고 지혜를 간직하는 사람들의 영광을 드높인다.

20  지혜는 주님을 두려워함에 그 뿌리를 박고 가지들이 싱싱하게 돋아나 영원히 산다.

21  주님을 두려워하면 죄를 물리칠 수 있고 주님을 두려워하면 분노를 멀리할 수 있다.

22  의롭지 못한 분노는 변명할 길 없으리니 분노에 치닫다 보면 멸망에 이른다.

23  인내력을 가진 사람이 잘 견디면 마침내는 큰 기쁨을 누리리라.

24  그는 말도 잘 참아서, 끝내 그의 총명이 모든 이로부터 찬양을 받으리라.

25  지혜의 보고 안에는 현인들의 격언이 차 있지만 죄인들에게는 경건한 교훈이 오히려 지겹다.

26  지혜를 원하거든 계명을 지켜라.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리라.

27  주님을 두려워함이 곧 지혜이며 교양이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신실과 온순이다.

28  주님 두려워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라. 주님을 두려워하되 안팎이 같아야 한다.

29  사람들 앞에서 위선을 행하지 말고 네 입술을 조심하여라.

30  자신을 치켜 올리지 말아라, 떨어져서 망신당할까 두렵다. 주님이 너의 비밀을 폭로하실 것이고, 너를 사람들 앞에서 넘어지게 하실 것이다. 네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서에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도망갑니다. 그분의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이기적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어둠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구원자인 메시아임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머물지 않고 권위가 있으며 생명력을 갖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알기 위해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실천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부모인 나자신의 권위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권위는 지혜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재물과 명예로 권위를 갖으려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요즈음 들어 한국의 정치를 보면 인생무상이 아닌 권력무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지혜를 갖고자 노력합시다. 이제는 비는 대상에서 벗어나 아는 대상으로 그리고 도와주는 존재에서 가르쳐주시는 존재로 우리 예수님을 만납시다.

허윤석 신부 작성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창에 "회복의 시간"을 치면 허윤석신부님의 홈페이지가 나온다. 오랜시간동안 신자들을 위한 힐링피정과 힐링음악 그리고 잔잔한 단상과 묵상이 풍성히 있는 이곳으로 초대한다. 강론은 사제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현재 성모기사회 잡지에 "곰곰히"라는 코너를 그리고 가톨릭 신문에 전례잠짜를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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